성덕대왕신종

신라시대의 범종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범종이다. 설화에 따라 에밀레종으로 부르거나 봉덕사(奉德寺)에 걸려 있던 종이라 하여 봉덕사종이라 부르기도 한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鍾)
(Sacred Bell of Great King Seongdeok)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국보
종목국보 (구)제29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1구 구
시대통일신라
위치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국립경주박물관)
좌표북위 35° 49′ 45.8″ 동경 129° 13′ 36.3″ / 북위 35.829389° 동경 129.226750°  / 35.829389; 129.226750
정보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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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cm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 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龍鈕)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乳廓) 아래로 2쌍의 비천상(飛天像)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앞·뒷면 두 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꽃모양으로 굴곡진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1]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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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년부터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손자 혜공왕771년에 완성했다. 봉덕사에 달았다가 조선시대인 1460년 수해로 봉덕사가 없어지자 영묘사(靈妙寺)로 옮겼으며, 다시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경주읍성 남문인 징례문에 걸어두었다가 1915년 8월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구(舊)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75년 5월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2][3]<성덕대왕신종에관한역사>

타종과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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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제야에 서른세 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하였다가,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다시 타종을 하였다. 그 뒤 2001년 10월 9일, 2002년 10월 3일, 2003년 10월 3일에 타종 행사를 열었으나, 2004년 12월 안전 보존을 위해 더 이상 타종을 중단했다

에밀레 종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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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레 종 전설은 불교와 관련된 설화들을 전하는 삼국유사에서도 기록되지 않았고,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민가에서만 떠돌던 전설이었으나, 구한말 선교사들에 의해서 처음 기록되기 시작한다. 1895년에 주한미국공사 앨런, 1901년에 고종의 밀사였던 헐버트 역시 에밀레 종 전설을 전하고 있다. 국내 기록에서는 1925년 8월 5일자 《매일신보》 창작문예란에 실린 렴근수(廉根守)의 《어밀네 종》이라는 동화로 처음 기록되었다. 이후 1943년 친일 극작가 함세덕이 희곡 《어밀네 종》을 집필하고 현대극장에 상연했다. 이를 근거로 에밀레 종 설화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설화라는 주장이 있지만[4], 그 반대 주장 또한 존재한다.[5]

조선에 선교사로 왔던 헐버트의 글을 보면

"...the legend of the casting of the great bell that hangs in the centre of Seoul....(중략)....The Koreans hear in the dull thud of the wooden beam against the bell a faroff resemblance to the word 'em-mi', which means 'Mother'. Hence the legend."[6]

라는 글이 있다. 이는 '에미'(엄마)라고 부르는 종이 서울 중심에 있다는 것인데, 이는 에밀레 종 전설과 보신각 종을 혼동한 것으로[출처 필요] 보인다.

한편, 에밀레종 전설을 연구한 황인덕 [7]에 의하면 중국 감숙성 무위시 대운사(大云寺)에 있는 종에도 비슷한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이 종은 당 또는 오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며, 종이 울릴 때 "낭아娘呀, 낭娘"또는 "응당應當, 응당應當"하는 소리가 난다는 전설이 있다. 이 낭이라는 말이 어머니를 가리킨다는 설이다.[7]

KBS 역사 스페셜 '에밀레 종의 진실'편에서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피살된 혜공왕과 관련된 당시 현실이 반영되어 서라벌에서 구전된 전설일 수 있다는 의견을 방송했다.

종에 새겨진 글귀의 일부이다.

경덕왕은 아버지를 위해 종을 만들기로 하여 신라 곳곳에서 모금이 벌어졌다. 스님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만드는 데 힘을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그중에는 부잣집, 가난한 집, 따스하게 맞이하는 집 싫어하는 기색을 하는 집도 있었다. 스님 한분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모금을 하고 있었는데 어린아이를 업은 아낙네가 스님을 놀리듯 말했다. "아이고, 스님, 저희 먹을 것도 없어요. 보세요, 저희 집에 드릴 거라곤 이 애 밖에 없다고요. 가져가실거면 이 애라도 가져가시든가요." 스님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 집을 나왔다. 모금이 모이자 전국에서 기술자들이 온갖 정성을 들여도 종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소식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경덕왕은 관원에게 점을 치게 했는데, 여러갈래로 알아본 결과 성금을 모으던 스님에게 자신은 애 밖에 없다고 한 아낙네 때문에 부정을 탄 것으로 결론 지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부정을 씻어 낼 수 있나요?" "그 아낙네가 한 말을 지키는 것밖에 없습니다. 종을 만드는데 낼 것이 아이밖에 없다고 했으니 그리해야지요" 결국 그 집 아이를 종 만드는데 바칠 수 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종이 드디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리가 마치 " 에밀레...... 에밀레......" 같았다. 엄마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에미탓에......에미탓에.......' 같기도 하여 에밀레종이라 부른다고 한다.[8]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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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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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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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덕대왕신종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성덕대왕 신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3. 오, 상욱 (2018년 4월 26일). “성덕대왕신종과 신라망국의 애상함”. 《경주신문》. 2018년 6월 17일에 확인함. 
  4. 최, 동군 (2017년 12월 1일). “한 해의 끝과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문화재청》. 2018년 6월 17일에 확인함. 
  5. 이, 문영 (2017년 2월 20일). “에밀레종의 전설 유래는 일제 조작일까 당나라일까”. 《매일경제》. 2018년 6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6월 17일에 확인함. 
  6. H. B. Hulbert, "The Korean Legend on the 'Sprit of the Bell'", The Korean Review, 1901
  7. 에밀레종 전설의 근원과 전래, 황인덕, 어문연구 제56권 (2008년 4월) pp.289-322, 어문연구학회, 2008
  8. 10대들을 위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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