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옥씨
나라 |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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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경상남도 의령군 |
시조 | 옥진서(玉眞瑞) |
중시조 | 옥은종(玉恩宗), 옥여(玉汝) |
집성촌 | 경상남도 의령군 칠곡면 산남리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기도리 경상남도 통영시 도산면 수월리 |
주요 인물 | 옥고, 옥관빈, 옥조남, 옥만호 |
인구(2015년) | 22,452명 |
의령 옥씨(宜寧玉氏)는 경상남도 의령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
[편집]시조 옥진서(玉眞瑞)는 고구려(高句麗)의 요청에 의해 당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八才士) 중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서 국학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고,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으며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그 후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할 수 없어 고려(高麗)조에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기세조로 하는 계통과 평장사(平章事) 옥여(玉汝)를 기세조로 하는 계통으로 갈라졌다.
옥은종의 6세손인 복응재생(服膺齋生) 옥안덕(玉安德)의 아들 옥사온(玉斯溫)이 1389년(창왕 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1] 옥사온의 동생인 진성감무(珍城監務) 옥사미(玉斯美)의 아들 옥고(玉沽)는 1399년(정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어사부 장령(御史府掌令) 등을 역임하였다.[2]
집성촌
[편집]논란
[편집]『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에 1389년(고려 창왕 1년) 문과에 급제한 왕사온(王斯溫)이 있다. 하지만 『조선씨족통보』에는 의령 옥씨 편에 “辛昌己巳文科” 옥사온(玉斯溫)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이성계의 역성 혁명 이후 여말선초에 개성 왕씨(王氏)에서 옥씨(玉氏)로 개성한 것일 수도 있다. 옥사온의 질 옥고(玉沽)의 문과 방목을 보면 아버지는 옥사미(玉斯美)이다. 옥사온은 옥사미의 동생이다.[3]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옥고는 반성 옥씨(班城玉氏) 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형 옥사미는 반성 옥씨로, 동생 옥사온은 의령 옥씨로 분적한 것 같다. 현재는 의령 옥씨로 합보하였다. 1918년에 발행된 개성 왕씨 족보 무오보에 옥(玉)씨 성을 쓰던 일부가 왕(王)씨로 환성하였다.
항렬자
[편집]12세 | 13세 | 14세 | 15세 | 16세 | 1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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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유) | 啓(계) | 應(응) | 成(성) | 敬(경) | 得(득) 炳(병) |
과거 급제자
[편집]의령 옥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명, 무과 급제자 6명, 생원·진사 8명을 배출하였다.
- 문과
옥경련(玉景鍊) 옥고(玉沽) 옥려(玉礪) 옥병관(玉秉觀) 옥진휘(玉晉輝)
- 무과
옥글동(玉文里同) 옥대집(玉大集) 옥승(玉承) 옥신호(玉信浩) 옥영윤(玉永潤) 옥채형(玉采荊)
- 생원시
옥광형(玉光亨) 옥세보(玉世寶) 옥진소(玉振韶) 옥치규(玉穉圭)
- 진사시
옥이탁(玉以琢) 옥재온(玉在溫) 옥진함(玉振) 옥진휘(玉晉輝)
인구
[편집]- 1985년 4,622가구 18,900명
- 2000년 6,157가구 19,368명
- 2015년 의령 옥씨 19,095명 + 의춘 옥씨 3,357명 = 22,452명